선배녀 - 28부
괜히 책을 펼쳤다가 덮어버렸다. 책상 정리도 했다. 컴퓨터를 켰다가도 이내 다시 꺼버렸다. 울리지 않은 핸드폰도 확인해봤다. 침대에도 누워보고 방안을 서성이며 머리카락도 주웠다. 거실로 나가 텔레비전도 봤다. 그 무엇을 하더라도 제대로 집중할 수 없었다. 단 한 가지 꾸준히 하고 있었던 건 시계를 쳐다보는 일이었다. 그것만은 꾸준히, 그리고 시간이 갈수록 더 자주 하고 있었다.
시은이가 소개팅을 한다던 시간이 한 시간 안으로 들어왔다. 나는 더욱 초조해져 안절부절 했다. 내가 왜 이러는지 알 수 없었다. 시은이한테 여자로서의 어떤 감정이 있느냐고 자문을 해봤지만 그건 아무래도 아닌 거 같았다. 만약 그랬다면 난 시은이를 내 여자로 만들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그냥 날려 보내지 않았을 테니 말이다.
엄마가 운동을 하고 돌아왔다. 그리고는 잔소리를 했다. 그렇게 정신없게 할 거면 차라리 나가라는 말까지 했다. 나는 엄마에게 등 떠밀려 나가는 것처럼 바로 나갈 채비를 했다. 시은이에게 가볼까 말까 망설이던 차에 엄마를 핑계 삼아 일단 나오게 된 것이다.
내가 시은이 소개팅 하는 곳에 가서 할 수 있는 게 아무 것도 없다는 걸 머리로 되뇌고 있었지만 발길은 이미 시은이에게로 향하고 있었다.
나는 시은이가 학교 근처 커피전문점에서 소개팅을 한다는 단서 하나만을 갖고 있었다. 시은이에게 연락해서 정확히 어디에서 하는지 물어볼까 잠시 고민했지만 그건 아니라는 결론에 닿았다. 너무 티 나게 시은이 앞에 나타나는 짓은 아무리 낯이 두꺼워도 나는 못할 거 같았다.
나는 운명에 맡기기로 했다. 수많은 커피전문점 중에 하나를 골라 만약 그곳에 시은이가 있다면 두말 않고 데리고 나오고, 그렇지 않다면 나는 깨끗하게 마음을 돌리고 발걸음도 돌려 집으로 가기로 결정했다.
가장 목이 좋고 규모가 큰 커피전문점을 선택했다. 느낌이 좋았다. 웬만해서는 이곳에서 만날 거라는 직감이 들었다. 나는 커피전문점까지 한걸음에 내달렸다. 숨을 돌릴 시간마저 내겐 초조함을 더하는 시간이었기에 바로 커피전문점 안을 들어가 샅샅이 뒤졌다.
구석 창가 쪽에 잘생긴 남자가 정면으로 눈에 들어왔고, 맞은편에 시은이로 보이는 여자가 앉아 있었다. 나는 그들에게 거리낌 없이 다가가 여자의 어깨를 잡았다. 여자가 뒤돌아봤을 때 나는 죄송하다는 말을 내뱉었다.
내가 돌아서 나오는데 그들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그들은 날 어떻게 생각하고 웃을지 궁금했다. 눈에 불을 켜고 바람난 여자친구를 찾아다니는 인간으로 보일 것 같다는 생각이 가장 컸다.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지금 중요한 건 이곳에 시은이가 없다는 것이었다.
나는 지금 곧바로 집에 가야 마땅하지만 망설이고 있었다. 망설인다기보다는 발이 떨어지지 않고 있다는 것이 옳을지도 몰랐다. 그래서 나 자신과 타협을 시작했다. 새롭게 도달한 결론은 한번으로는 너무 야박하다는 것이었다. 내 자신에게 기회를 더 줄 수 있는 관대함이 오늘 이 시간을 살았던 내게 후회를 안겨주지 않을 것 같았다.
또 다른 커피전문점을 찾았다. 이번에는 생각을 하지 않고 골랐다. 처음에 떠오른 곳이 내 발길을 멈춘 곳이었다. 서두르지 않았다. 찬찬히 사람들을 훑어보았다. 어디에도 시은이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그럴 리 없다고 돌아다니며 사람들의 얼굴을 확인했다. 정말 어디에도 없었다. 한숨을 쉬고 돌아섰다. 그리고 또 타협했다. 삼세번의 기회는 당연하다는 것으로 받아들였다.
이번에 찾은 곳은 직원이 유난히도 반갑게 인사하며 맞이해줬다. 나는 그 목소리조차도 달갑게 들리지 않았다. 직원처럼 시은이도 소개팅 하는 남자에게 친절하게 웃으며 얘기하고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나에게만 보여줬던 모습을 나만 간직할 수 있는 모습이길 바랐고, 지키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남녀가 앉아 있는 테이블의 여자는 모두 시은이로 보였다. 여기저기서 시은이가 웃고 얘기하고 있었다. 모두가 시은이로 보였기에 모두가 시은이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만약 시은이가 있었다면 이들 모두가 시은이가 같아 보일 수 없을 거라는 확신 때문이었다.
내게 더 이상의 타협은 없었다. 단지 내게 주어진 의무인 양 당연하게 다른 커피전문점을 찾아가는 나였다.
커피전문점 안의 계단을 올라가서 고개를 돌리는 순간 모든 배경은 사라지고 시은이만 보였다. 내가 알던 모습의 시은이였다. 당연한 것일지도 모르지만 내게만 보여주는 모습의 시은이는 아니었다. 미소가 절로 지어졌다.
“엇, 시은아 여긴 웬일이야?”
고개를 돌리는 시은이는 차가운 우아함의 매력을 발산했다. 내가 이 자리에 서있다는 게 놀랍지도 않은지 미소를 지어보이는 시은이였다.
“어. 나 소개팅 중이야. 그때 얘기했잖아.”
시은이가 무슨 말을 하는지 들리지 않았다. 아니, 분명 귀에 들어왔지만 의도적으로 흘려보내고 나는 시은이의 옆에 앉았다.
“오랜만이다. 반갑네. 어떻게 지냈어?”
“오랜만은 무슨……. 넌 여기 무슨 일로 왔어?”
“커피 마시면서 책 보다가 가려는데 너 있기에 아는 척 했지.”
“어디 앉아 있었는데?”
“저 쪽.”
나는 돌아보지도 않고 대충 손으로 가리켰다. 시은이는 뭐가 그리 좋은지 연신 미소를 잃지 않았다. 그러다가 고개를 돌려 말했다.
“미안해. 친구를 우연히 만나서.”
그때서야 나는 남자의 얼굴을 보았다. 그럭저럭 봐줄만한 얼굴이었다. 지적인 분위기가 흐르지만 눈빛이 내뿜는 기운으로 봐서는 결코 공부만 한 샌님으로 보이지는 않았다. 남자인 내가 봐도 매력적인 느낌이 오는 남자였다.
“괜찮아. 오랜만에 만난 거 같은데 얘기 좀 나눠. 화장실 갔다 올게.”
여자에게 부담을 주지 않는 센스까지 갖춘 남자였다. 시은이와 어떤 얘기를 나눴을지는 모르겠지만 지금까지 그를 본 것만으로도 웬만한 여자들의 호감을 살만한 스타일이었다.
“소개팅 어때? 재밌어?”
“그냥 그렇지. 소개팅이란 게 이런 거구나 하고 있어.”
“재미없을 거 같아.”
“근데 넌 진짜 여기 왜 온 거야?”
“커피 마시고 책 보러 왔다니까.”
“나 보러 온 거야?”
시은이는 기대에 가득 찬 눈빛으로 날 쳐다봤다.
“무슨 소리야. 커피 마시고 책 보러 왔다니까.”
“나 보러 온 거 아냐?”
“얘가 왜이래?”
“그럼 책은 어디 있는데?”
난 허를 찔린 걸 너무 확연히 보여줬다. 그럼에도 뒤늦게 아닌 척 연기했다.
“여기 비치되어 있는 거 봤어.”
시은이는 더 이상 물어보지 않고,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하지만 미소는 얼굴에서 사라질 줄을 몰랐다.
남자는 돌아왔고, 이번에는 내가 자리에서 일어나야 한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모른 체 했다.
“시은이 어때요?”
“예쁘고, 아는 것도 많고, 음……. 아직 얘기를 많이 못 나눠봐서요.”
“얘가 조금 냉소적으로 보이지만 알고 보면 완전 냉소적이거든요.”
시은이의 따가운 시선이 느껴졌지만 나는 계속 말을 이어갔다.
“그게 싸가지가 없는 걸로 보일 수는 있는데, 사실 좀 없긴 한데 그래도 개념이 없는 건 아니니까 그렇게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될 거예요.”
“너 가.”
시은이에게 밀려 내 엉덩이는 의자에서 떨어지고 말았다. 이 마당에 다시 앉아 버틴다는 건 우스울 거 같아 자리를 피해줄 수밖에 없었다.
“이따 전화해.”
“응. 잘 가.”
난 쓸쓸히 돌아섰고, 계단을 내려가기 전에 뒤돌아보니 시은이가 그 남자에게 웃어주고 있었다. 또한 남자도 활짝 웃고 있었다. 대체 나는 무슨 짓을 저지르고 가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그리고 그때야 알았다. 내가 시은이를 찾게 되면 뭘 하려 했었는지 말이다. 시은이는 이미 내 손에 끌려 나갔어야 했다. 그런데 어쩌다 둘의 긴장감을 풀어주는 역할만 하고 가는 건지 나란 놈은 제대로 하는 게 하나도 없었다.
이제 와서 시은이를 데리고 나가는 것도 우스워보였다. 그리고 아까의 호기도 사라졌다. 내가 무슨 명분으로 시은이를 데리고 나올 것이며, 데리고 나와서도 시은이에게 해줄 말이 딱히 없었다. 이렇게 앞뒤를 재다보니 이성이 찾아온 건지 이성이 찾아와서 앞뒤를 재는 건지 순서는 중요치 않지만 결과는 중요했다.
나는 터벅터벅 무거운 발걸음을 옮겼다. 횡단보도까지 불과 50m도 안 되는 거리였지만 꽤나 오랜 시간이 걸렸다. 하지만 횡단보도를 건너는데 걸린 시간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었다. 신호가 서너 번 바뀌는 동안 난 멍하니 사람들이 건너는 모습을 지켜봤고, 누군가 내 어깨를 치고 지나가고 나서야 횡단보도를 건널 수 있었다.
여전히 더딘 발걸음으로 걷고 있는데 시은이에게서 전화가 왔다.
[어디야?]
“집에 가고 있지.”
[술 마시자.]
“소개팅은?”
[와서 얘기해.]
“그 남자랑 같이 마시는 거야?”
[일단 와. 거기 앞에 있으니까 빨리 와.]
“알았어.”
그렇게도 멀게만 느껴졌던 길이 단숨에 달려갈 수 있는 길이 되었다.
“그 남자는?”
“보냈어.”
“왜?”
“그냥. 술이나 마시러 가.”
술을 마시는 동안 소개팅에 관한 얘기나 서로의 마음을 드러내놓는 얘기는 하지 않았다. 늘 그렇듯 우리는 서로가 정말 잘 통하는 사람이라는 걸 확인하는 얘기들만 오갔다.
서로 같은 곳을 바라보고 있었고, 그 지점은 평생을 가도 만나지 않는 그런 평행선의 가운데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우리 둘은 각각의 평행선 위에 서있는 사람인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손만 뻗으면 쉽게 닿을 수 있는 거리를 갖고 있다는 것을 서로가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우리 둘 다 쉽사리 손을 뻗지 않았다. 내 생각은 그랬다. 내가 손을 뻗는다면 시은이가 그 평행선에서 밀려나버릴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머릿속을 지배했다. 내가 시은이를 아는 만큼 시은이가 나를 아는 만큼 그 불안감도 커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우린 이렇게 만나지 말았어야 했다. 아니, 좀 더 일찍 서로의 선을 확인했어야 했을지도 몰랐다. 내 옆에 시은이가, 시은이 옆에 내가 손을 꽉 쥐고 갈 수 있는 선을 갖고 있다는 것을 말이다.
조금 더 술을 마시면 시은이를 밀쳐낼 것 같았다. 그렇기에 자리에서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시은이를 집까지 바래다주고 돌아서려는데 시은이가 한 마디 말을 던지고 집으로 들어갔다.
“기다릴게.”
난 시은이의 말을 곱씹었다. 기다릴게. 기다릴게. 기다릴게. 시은이는 내게 혼돈을 주었다. 기약이 없는 미래를 선택한 시은이에게 내가, 확신도 못하는 내가, 시은이가 서있는 선이 내게 어떤 의미인지도 모르는 내가 과연 어떤 대답을 해줄 수 있을지 몰랐다.
시은이는 그걸 기다린다고 했을지도 모르겠다. 아무 것도 모르는 내가 알 수 있는 날이 올 때를 기다린다는 의미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시은이가 내게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옆에 있어줄 사람인지, 우정이라는 이름으로 옆에 있어줄 사람인지는 시간이 흐르면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내게 스스로 말했다. 나도 기다리겠다고. 시간이 내게 가르쳐줄 때까지 기다려보겠다고. 시은이가 날 기다리는 한 나도 기다려보겠다고. 너무 늦지 않기를 바랄 뿐이었다.
* * *
지연이 누나가 날 피한지도 어느덧 2주가 다 되어갔다. 생각할 시간을 갖고 싶다고 했기에 그 시간을 방해하고 싶지 않았다. 그동안 내게도 머리 아픈 일들이 꽤나 있었기에 크게 신경 쓰지 않고 시간을 흘려보낼 수 있었다. 하지만 어느 정도 여유가 생기니 지연이 누나가 보고 싶었다. 이게 사랑의 감정은 아니라는 것은 분명했다. 어떻게든 지연이 누나와의 관계를 마무리 짓고 싶었다. 그 결과가 어떻게 되든 나는 담담하게 받아들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미리 어떤 언질도 주지 않고 밤늦게 무작정 지연이 누나의 집으로 찾아갔다. 나오지 않는다면 밤새 기다릴 거라는 엄포를 놓을 생각이었다. 지연이 누나는 이런 내 생각을 무색하게 만들었다. 지연이 누나는 집에 없었다. 친구와 만나고 있다고 했다.
지금 내가 지연이 누나의 집 앞에 있다는 얘기까지는 하지 않았다. 혹시나 피할까 싶어 올 때까지 조용히 기다렸다가 만날 셈이었다.
어떤 친구를 만나고 있는 건지 한 시간이 가도 두 시간이 가도 지연이 누나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어느덧 시간은 새벽 한 시가 다 되었지만 아직까지 지연이 누나를 닮은 사람조차 보지 못했다.
자동차의 헤드라이트가 눈부셔 차 옆으로 몸을 숨겼다. 지나갈 줄 알았던 차는 속도가 점점 줄더니 지연이 누나의 집 앞에 멈춰 섰다. 지연이 누나와 같은 건물에 사는 사람이겠거니 하고 그 어떤 관심도 주지 않았다. 차의 시동이 꺼졌고, 차문이 열리고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뒤이어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데이트를 했던 모양이다. 남자는 오늘 즐거웠다는 얘기를 하고 있었다. 대수롭지 않게 흘려들으려 했는데 그 다음에 들려오는 여자의 목소리에 내 귀는 쫑긋 세워졌다.
내 귀를 의심하며 쳐다보니 그 목소리는 내가 알고 있는 지연이 누나의 목소리가 맞았다. 지연이 누나는 수줍게 미소를 지어보이고 있었다. 이런 광경을 보게 될 것이라는 상상은 일부러 해보려 해도 그려지지 않던 장면이었다. 지연이 누나에게는 오직 나밖에 없을 거라는 착각을 산산조각내고 있었다.
너무 당황스러운 장면에 나는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몰랐다. 아니, 그 어떤 생각도 나지 않았다. 바보가 되어 바보상자를 들여다보고 있는 것 마냥 남 얘기 같았다. 바보상자였다면 감정이입을 하기도 하겠지만 이건 내 일임에도 불구하고 분노나 배신감 따위의 감정조차도 들지 않았다. 머릿속이 비어버린다는 말이 이럴 때 쓰는 얘기라는 걸 절실히 느꼈다.
지연이 누나와 그 남자는 몇 마디 더 주고받는 것 같았지만 난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다만 지연이 누나가 내게 사랑스러움을 표현할 때 쓰던 목소리 톤이라는 것만 느낄 수 있었다.
지연이 누나가 집으로 들어가자 남자는 차를 타고 떠났다. 나는 이대로 돌아서야할지 지연이 누나를 만나야할지 결정하지 못했다. 각각의 경우를 생각해보았지만 제대로 정리가 되지 않았다. 두 가지 경우가 마구 섞여 머리가 아플 지경이었다. 그때 지연이 누나에게 전화가 왔다.
“여보세요?”
[아까 왜 전화했어?]
“너 누구 만났어?”
[친구.]
“친구 누구?”
[어? 유리.]
거짓말을 참 못하는 지연이 누나였다. 내가 지금의 장면을 보지 않았더라도 이상하다는 낌새를 감지할 수 있을 정도로 어설픈 연기였다.
“여자야?”
[응. 근데 왜 전화했었어?]
“나 집 앞이야.”
[응?]
“너의 집 앞이라고.”
지연이 누나는 말이 없었다. 당황해 아무 말도 못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나와.”
나는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었다. 달려와 변명을 해도, 용서를 빌어도 난 봐주지 않을 것이라고 마음먹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달려올 줄 알았던 지연이 누나는 한참이 지나서야 천천히 걸어오고 있었다. 그 모습에 어처구니가 없어서인지 허탈한 웃음이 나오며 오히려 마음은 진정되는 것 같았다.
“그 남자가 유리누나야?”
“아니.”
“거짓말 한 거야?”
“아니.”
지연이 누나의 성의 없는 대답에 약간 짜증이 났다.
“그럼 뭔데?”
“유리랑도 같이 있었어.”
“그걸 날더러 믿으라고 하는 말이야?”
“믿지 않아도 어쩔 수 없지만 사실이야.”
“못 본 사이 많이 뻔뻔해졌다.”
“사실을 말한 것뿐이야.”
“어쨌든 저 남자랑 같이 있었던 건 사실이네?”
“그냥 친구야.”
믿기지도 않는 말로 피해가는 것도 모자라 말도 안 되는 핑계를 대는 지연이 누나를 보니 헛웃음이 절로 나왔다.
“그냥 친구? 그냥 친구가 어디 있어? 그리고 그냥 친구면 왜 말 안 했는데?”
“꼭 말해야 돼?”
지연이 누나는 날 사랑하는 게 너무 힘들다며 눈물을 보이던 모습을 잊은 것 같았다. 완전히 다른 사람이라고 느껴질 정도로 앙칼진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나는 오히려 잘 됐다고 생각했다.
“이러고 다니고 싶어서 생각할 시간 달랬던 거야? 갈아탈 남자 찾을 시간이 필요했나봐?”
“네가 이러니까 말을 안 한 거야.”
“네가 제대로 말을 했으면 안 이랬겠지.”
“그만해. 이런 사소한 오해로 싸우고 싶지 않아.”
이게 설령 사소한 오해라고 할지라도 나는 사소한 오해로 남겨두고 넘어갈 생각이 전혀 없었다. 어떤 이유에서건 난 지연이 누나와의 정리를 원했고, 그렇게 될 수 있도록 너무나도 쉽게 빌미를 제공해준 지연이 누나였기 때문이다.
“사소한 오해? 네가 바람나서 딴 남자 끼고 다니는 게 사소한 오해야?”
“바람은 누가 났다고 그래?”
“딴 게 바람이야? 나 몰래 딴 남자 끼고 다니는 게 바람 아니면 뭐야? 키스도 하고, 섹스도 하고, 사랑해 이딴 말 지껄여줘야 바람이야?”
“그냥 친구라고 했잖아!”
내 목소리가 동네를 뒤흔들기 직전에 내 핸드폰이 우리 둘 사이를 막아섰다. 난 핸드폰을 꺼냈다. 전화를 건 사람은 소연이였다. 우리의 싸움을 더 키워줄 수 있는 화약이 생겼다. 난 받을까 말까 망설이는 척 하며 은근슬쩍 소연이의 전화라는 것을 지연이 누나가 볼 수 있도록 했다. 그리고는 수신거부를 하고 지연이 누나를 쳐다보니 지연이 누나는 놓치지 않았는지 내게 따발총을 쏘았다.
“말 잘했다. 그럼 너는 뭔데? 아직도 소연이한테 전화 오는 넌 뭔데? 이 여자 저 여자 건들고 다니는 넌 뭐냐고!”
“지금 중요한 건 소연이가 아니잖아.”
“아니. 나한테는 중요해. 난 네가 소연이 정리하고 나한테 잘못했다고 빌러 온 줄 알았거든. 그래서 이렇게 네 앞에 서있었던 건데 지금은 내가 왜 여기 있는지 모르겠거든.”
“넌 딴 짓거리 하고 다니면서 내가 빌기를 바랐던 거야? 너 참 이기적이다.”
“그냥 친구라고 몇 번 얘기해!”
그냥 친구라는 말, 내가 지연이 누나를 사랑하고 있었다면 믿어줄 수도 있었다. 믿지 않았어도 믿는 척이라도 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게 다 무슨 소용인가. 이미 난 지연이 누나랑 헤어질 마음으로 여기에 서있는데 말이다.
“알 게 뭐야? 지금 떡이라도 치고 왔는지…….”
나의 비아냥거림에 지연이 누나는 할 말을 잃었는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지연이 누나의 큰 눈엔 조금씩 눈물이 고였다. 그렇지만 끝내 흘려보내지는 않고 삼켜내며 말했다.
“너 이렇게 나 못 믿으면서 어떻게 지금까지 만났어?”
“믿을만한 모습을 보여줬어야 믿지! 남자 차에서 내린 것도 모자라 희희덕거리다가 들어가는 모습을 보여주고는 널 믿으라고?”
“그러는 넌? 넌 나한테 어떻게 해놓고 겨우 이거 갖고 난리야?”
“겨우? 참, 나. 겨우라고? 너 같은 애랑은 더 이상 할 얘기가 없다. 우리 그만 만나자.”
“그래, 좋아. 나도 너란 놈한테 질질 끌려 다니는 거 이제 지겨워서 못하겠어. 꼴 보기 싫으니까 꺼져!”
지연이 누나의 말에 화가 나고 머리가 돌아버려 뺨이라도 한 대 후려갈겨 주고 싶었지만 나는 이를 악물고 한 마디만 남겨놓고 돌아섰다.
“걸레 같은 년.”
돌아서는 순간 모든 게 후련했다. 이 모든 게 내가 바라왔던 일이었다. 조금도 아쉬운 마음이 들지 않았다. 어쩌면 너무나도 간절히 바라왔던 일이었기에 그렇게 믿었는지도 몰랐다. 지연이 누나가 그 남자에게 했던 표정과 말투가 내 환상 속에서 그려졌던 것일 수도 있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어찌 되었건 내가 바랐던 일이 현실이 되었고, 나는 미안한 마음 따위는 가지지 않아도 된다는 자기위안을 하며 앞으로 펼쳐질 나의 행복한 나날들만 떠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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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부에서 민기가 소연이 아닌 혜림이를 범한 것에 대해 의견이 많으셨습니다.
독자님들의 생각과는 달리 민기는 윤호에 대한 복수의 목적으로 혜림이를 범한 것이 아닙니다.
이게 다 저의 글쓰는 능력이 부족해 생긴 오해겠지요.
그래서 1인칭 시점의 글이 쓰기도 힘들고 읽기도 힘든 거 같습니다.
아무튼 바로 29부도 띄워드리겠습니다.
시은이가 소개팅을 한다던 시간이 한 시간 안으로 들어왔다. 나는 더욱 초조해져 안절부절 했다. 내가 왜 이러는지 알 수 없었다. 시은이한테 여자로서의 어떤 감정이 있느냐고 자문을 해봤지만 그건 아무래도 아닌 거 같았다. 만약 그랬다면 난 시은이를 내 여자로 만들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그냥 날려 보내지 않았을 테니 말이다.
엄마가 운동을 하고 돌아왔다. 그리고는 잔소리를 했다. 그렇게 정신없게 할 거면 차라리 나가라는 말까지 했다. 나는 엄마에게 등 떠밀려 나가는 것처럼 바로 나갈 채비를 했다. 시은이에게 가볼까 말까 망설이던 차에 엄마를 핑계 삼아 일단 나오게 된 것이다.
내가 시은이 소개팅 하는 곳에 가서 할 수 있는 게 아무 것도 없다는 걸 머리로 되뇌고 있었지만 발길은 이미 시은이에게로 향하고 있었다.
나는 시은이가 학교 근처 커피전문점에서 소개팅을 한다는 단서 하나만을 갖고 있었다. 시은이에게 연락해서 정확히 어디에서 하는지 물어볼까 잠시 고민했지만 그건 아니라는 결론에 닿았다. 너무 티 나게 시은이 앞에 나타나는 짓은 아무리 낯이 두꺼워도 나는 못할 거 같았다.
나는 운명에 맡기기로 했다. 수많은 커피전문점 중에 하나를 골라 만약 그곳에 시은이가 있다면 두말 않고 데리고 나오고, 그렇지 않다면 나는 깨끗하게 마음을 돌리고 발걸음도 돌려 집으로 가기로 결정했다.
가장 목이 좋고 규모가 큰 커피전문점을 선택했다. 느낌이 좋았다. 웬만해서는 이곳에서 만날 거라는 직감이 들었다. 나는 커피전문점까지 한걸음에 내달렸다. 숨을 돌릴 시간마저 내겐 초조함을 더하는 시간이었기에 바로 커피전문점 안을 들어가 샅샅이 뒤졌다.
구석 창가 쪽에 잘생긴 남자가 정면으로 눈에 들어왔고, 맞은편에 시은이로 보이는 여자가 앉아 있었다. 나는 그들에게 거리낌 없이 다가가 여자의 어깨를 잡았다. 여자가 뒤돌아봤을 때 나는 죄송하다는 말을 내뱉었다.
내가 돌아서 나오는데 그들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그들은 날 어떻게 생각하고 웃을지 궁금했다. 눈에 불을 켜고 바람난 여자친구를 찾아다니는 인간으로 보일 것 같다는 생각이 가장 컸다.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지금 중요한 건 이곳에 시은이가 없다는 것이었다.
나는 지금 곧바로 집에 가야 마땅하지만 망설이고 있었다. 망설인다기보다는 발이 떨어지지 않고 있다는 것이 옳을지도 몰랐다. 그래서 나 자신과 타협을 시작했다. 새롭게 도달한 결론은 한번으로는 너무 야박하다는 것이었다. 내 자신에게 기회를 더 줄 수 있는 관대함이 오늘 이 시간을 살았던 내게 후회를 안겨주지 않을 것 같았다.
또 다른 커피전문점을 찾았다. 이번에는 생각을 하지 않고 골랐다. 처음에 떠오른 곳이 내 발길을 멈춘 곳이었다. 서두르지 않았다. 찬찬히 사람들을 훑어보았다. 어디에도 시은이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그럴 리 없다고 돌아다니며 사람들의 얼굴을 확인했다. 정말 어디에도 없었다. 한숨을 쉬고 돌아섰다. 그리고 또 타협했다. 삼세번의 기회는 당연하다는 것으로 받아들였다.
이번에 찾은 곳은 직원이 유난히도 반갑게 인사하며 맞이해줬다. 나는 그 목소리조차도 달갑게 들리지 않았다. 직원처럼 시은이도 소개팅 하는 남자에게 친절하게 웃으며 얘기하고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나에게만 보여줬던 모습을 나만 간직할 수 있는 모습이길 바랐고, 지키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남녀가 앉아 있는 테이블의 여자는 모두 시은이로 보였다. 여기저기서 시은이가 웃고 얘기하고 있었다. 모두가 시은이로 보였기에 모두가 시은이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만약 시은이가 있었다면 이들 모두가 시은이가 같아 보일 수 없을 거라는 확신 때문이었다.
내게 더 이상의 타협은 없었다. 단지 내게 주어진 의무인 양 당연하게 다른 커피전문점을 찾아가는 나였다.
커피전문점 안의 계단을 올라가서 고개를 돌리는 순간 모든 배경은 사라지고 시은이만 보였다. 내가 알던 모습의 시은이였다. 당연한 것일지도 모르지만 내게만 보여주는 모습의 시은이는 아니었다. 미소가 절로 지어졌다.
“엇, 시은아 여긴 웬일이야?”
고개를 돌리는 시은이는 차가운 우아함의 매력을 발산했다. 내가 이 자리에 서있다는 게 놀랍지도 않은지 미소를 지어보이는 시은이였다.
“어. 나 소개팅 중이야. 그때 얘기했잖아.”
시은이가 무슨 말을 하는지 들리지 않았다. 아니, 분명 귀에 들어왔지만 의도적으로 흘려보내고 나는 시은이의 옆에 앉았다.
“오랜만이다. 반갑네. 어떻게 지냈어?”
“오랜만은 무슨……. 넌 여기 무슨 일로 왔어?”
“커피 마시면서 책 보다가 가려는데 너 있기에 아는 척 했지.”
“어디 앉아 있었는데?”
“저 쪽.”
나는 돌아보지도 않고 대충 손으로 가리켰다. 시은이는 뭐가 그리 좋은지 연신 미소를 잃지 않았다. 그러다가 고개를 돌려 말했다.
“미안해. 친구를 우연히 만나서.”
그때서야 나는 남자의 얼굴을 보았다. 그럭저럭 봐줄만한 얼굴이었다. 지적인 분위기가 흐르지만 눈빛이 내뿜는 기운으로 봐서는 결코 공부만 한 샌님으로 보이지는 않았다. 남자인 내가 봐도 매력적인 느낌이 오는 남자였다.
“괜찮아. 오랜만에 만난 거 같은데 얘기 좀 나눠. 화장실 갔다 올게.”
여자에게 부담을 주지 않는 센스까지 갖춘 남자였다. 시은이와 어떤 얘기를 나눴을지는 모르겠지만 지금까지 그를 본 것만으로도 웬만한 여자들의 호감을 살만한 스타일이었다.
“소개팅 어때? 재밌어?”
“그냥 그렇지. 소개팅이란 게 이런 거구나 하고 있어.”
“재미없을 거 같아.”
“근데 넌 진짜 여기 왜 온 거야?”
“커피 마시고 책 보러 왔다니까.”
“나 보러 온 거야?”
시은이는 기대에 가득 찬 눈빛으로 날 쳐다봤다.
“무슨 소리야. 커피 마시고 책 보러 왔다니까.”
“나 보러 온 거 아냐?”
“얘가 왜이래?”
“그럼 책은 어디 있는데?”
난 허를 찔린 걸 너무 확연히 보여줬다. 그럼에도 뒤늦게 아닌 척 연기했다.
“여기 비치되어 있는 거 봤어.”
시은이는 더 이상 물어보지 않고,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하지만 미소는 얼굴에서 사라질 줄을 몰랐다.
남자는 돌아왔고, 이번에는 내가 자리에서 일어나야 한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모른 체 했다.
“시은이 어때요?”
“예쁘고, 아는 것도 많고, 음……. 아직 얘기를 많이 못 나눠봐서요.”
“얘가 조금 냉소적으로 보이지만 알고 보면 완전 냉소적이거든요.”
시은이의 따가운 시선이 느껴졌지만 나는 계속 말을 이어갔다.
“그게 싸가지가 없는 걸로 보일 수는 있는데, 사실 좀 없긴 한데 그래도 개념이 없는 건 아니니까 그렇게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될 거예요.”
“너 가.”
시은이에게 밀려 내 엉덩이는 의자에서 떨어지고 말았다. 이 마당에 다시 앉아 버틴다는 건 우스울 거 같아 자리를 피해줄 수밖에 없었다.
“이따 전화해.”
“응. 잘 가.”
난 쓸쓸히 돌아섰고, 계단을 내려가기 전에 뒤돌아보니 시은이가 그 남자에게 웃어주고 있었다. 또한 남자도 활짝 웃고 있었다. 대체 나는 무슨 짓을 저지르고 가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그리고 그때야 알았다. 내가 시은이를 찾게 되면 뭘 하려 했었는지 말이다. 시은이는 이미 내 손에 끌려 나갔어야 했다. 그런데 어쩌다 둘의 긴장감을 풀어주는 역할만 하고 가는 건지 나란 놈은 제대로 하는 게 하나도 없었다.
이제 와서 시은이를 데리고 나가는 것도 우스워보였다. 그리고 아까의 호기도 사라졌다. 내가 무슨 명분으로 시은이를 데리고 나올 것이며, 데리고 나와서도 시은이에게 해줄 말이 딱히 없었다. 이렇게 앞뒤를 재다보니 이성이 찾아온 건지 이성이 찾아와서 앞뒤를 재는 건지 순서는 중요치 않지만 결과는 중요했다.
나는 터벅터벅 무거운 발걸음을 옮겼다. 횡단보도까지 불과 50m도 안 되는 거리였지만 꽤나 오랜 시간이 걸렸다. 하지만 횡단보도를 건너는데 걸린 시간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었다. 신호가 서너 번 바뀌는 동안 난 멍하니 사람들이 건너는 모습을 지켜봤고, 누군가 내 어깨를 치고 지나가고 나서야 횡단보도를 건널 수 있었다.
여전히 더딘 발걸음으로 걷고 있는데 시은이에게서 전화가 왔다.
[어디야?]
“집에 가고 있지.”
[술 마시자.]
“소개팅은?”
[와서 얘기해.]
“그 남자랑 같이 마시는 거야?”
[일단 와. 거기 앞에 있으니까 빨리 와.]
“알았어.”
그렇게도 멀게만 느껴졌던 길이 단숨에 달려갈 수 있는 길이 되었다.
“그 남자는?”
“보냈어.”
“왜?”
“그냥. 술이나 마시러 가.”
술을 마시는 동안 소개팅에 관한 얘기나 서로의 마음을 드러내놓는 얘기는 하지 않았다. 늘 그렇듯 우리는 서로가 정말 잘 통하는 사람이라는 걸 확인하는 얘기들만 오갔다.
서로 같은 곳을 바라보고 있었고, 그 지점은 평생을 가도 만나지 않는 그런 평행선의 가운데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우리 둘은 각각의 평행선 위에 서있는 사람인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손만 뻗으면 쉽게 닿을 수 있는 거리를 갖고 있다는 것을 서로가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우리 둘 다 쉽사리 손을 뻗지 않았다. 내 생각은 그랬다. 내가 손을 뻗는다면 시은이가 그 평행선에서 밀려나버릴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머릿속을 지배했다. 내가 시은이를 아는 만큼 시은이가 나를 아는 만큼 그 불안감도 커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우린 이렇게 만나지 말았어야 했다. 아니, 좀 더 일찍 서로의 선을 확인했어야 했을지도 몰랐다. 내 옆에 시은이가, 시은이 옆에 내가 손을 꽉 쥐고 갈 수 있는 선을 갖고 있다는 것을 말이다.
조금 더 술을 마시면 시은이를 밀쳐낼 것 같았다. 그렇기에 자리에서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시은이를 집까지 바래다주고 돌아서려는데 시은이가 한 마디 말을 던지고 집으로 들어갔다.
“기다릴게.”
난 시은이의 말을 곱씹었다. 기다릴게. 기다릴게. 기다릴게. 시은이는 내게 혼돈을 주었다. 기약이 없는 미래를 선택한 시은이에게 내가, 확신도 못하는 내가, 시은이가 서있는 선이 내게 어떤 의미인지도 모르는 내가 과연 어떤 대답을 해줄 수 있을지 몰랐다.
시은이는 그걸 기다린다고 했을지도 모르겠다. 아무 것도 모르는 내가 알 수 있는 날이 올 때를 기다린다는 의미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시은이가 내게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옆에 있어줄 사람인지, 우정이라는 이름으로 옆에 있어줄 사람인지는 시간이 흐르면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내게 스스로 말했다. 나도 기다리겠다고. 시간이 내게 가르쳐줄 때까지 기다려보겠다고. 시은이가 날 기다리는 한 나도 기다려보겠다고. 너무 늦지 않기를 바랄 뿐이었다.
* * *
지연이 누나가 날 피한지도 어느덧 2주가 다 되어갔다. 생각할 시간을 갖고 싶다고 했기에 그 시간을 방해하고 싶지 않았다. 그동안 내게도 머리 아픈 일들이 꽤나 있었기에 크게 신경 쓰지 않고 시간을 흘려보낼 수 있었다. 하지만 어느 정도 여유가 생기니 지연이 누나가 보고 싶었다. 이게 사랑의 감정은 아니라는 것은 분명했다. 어떻게든 지연이 누나와의 관계를 마무리 짓고 싶었다. 그 결과가 어떻게 되든 나는 담담하게 받아들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미리 어떤 언질도 주지 않고 밤늦게 무작정 지연이 누나의 집으로 찾아갔다. 나오지 않는다면 밤새 기다릴 거라는 엄포를 놓을 생각이었다. 지연이 누나는 이런 내 생각을 무색하게 만들었다. 지연이 누나는 집에 없었다. 친구와 만나고 있다고 했다.
지금 내가 지연이 누나의 집 앞에 있다는 얘기까지는 하지 않았다. 혹시나 피할까 싶어 올 때까지 조용히 기다렸다가 만날 셈이었다.
어떤 친구를 만나고 있는 건지 한 시간이 가도 두 시간이 가도 지연이 누나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어느덧 시간은 새벽 한 시가 다 되었지만 아직까지 지연이 누나를 닮은 사람조차 보지 못했다.
자동차의 헤드라이트가 눈부셔 차 옆으로 몸을 숨겼다. 지나갈 줄 알았던 차는 속도가 점점 줄더니 지연이 누나의 집 앞에 멈춰 섰다. 지연이 누나와 같은 건물에 사는 사람이겠거니 하고 그 어떤 관심도 주지 않았다. 차의 시동이 꺼졌고, 차문이 열리고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뒤이어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데이트를 했던 모양이다. 남자는 오늘 즐거웠다는 얘기를 하고 있었다. 대수롭지 않게 흘려들으려 했는데 그 다음에 들려오는 여자의 목소리에 내 귀는 쫑긋 세워졌다.
내 귀를 의심하며 쳐다보니 그 목소리는 내가 알고 있는 지연이 누나의 목소리가 맞았다. 지연이 누나는 수줍게 미소를 지어보이고 있었다. 이런 광경을 보게 될 것이라는 상상은 일부러 해보려 해도 그려지지 않던 장면이었다. 지연이 누나에게는 오직 나밖에 없을 거라는 착각을 산산조각내고 있었다.
너무 당황스러운 장면에 나는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몰랐다. 아니, 그 어떤 생각도 나지 않았다. 바보가 되어 바보상자를 들여다보고 있는 것 마냥 남 얘기 같았다. 바보상자였다면 감정이입을 하기도 하겠지만 이건 내 일임에도 불구하고 분노나 배신감 따위의 감정조차도 들지 않았다. 머릿속이 비어버린다는 말이 이럴 때 쓰는 얘기라는 걸 절실히 느꼈다.
지연이 누나와 그 남자는 몇 마디 더 주고받는 것 같았지만 난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다만 지연이 누나가 내게 사랑스러움을 표현할 때 쓰던 목소리 톤이라는 것만 느낄 수 있었다.
지연이 누나가 집으로 들어가자 남자는 차를 타고 떠났다. 나는 이대로 돌아서야할지 지연이 누나를 만나야할지 결정하지 못했다. 각각의 경우를 생각해보았지만 제대로 정리가 되지 않았다. 두 가지 경우가 마구 섞여 머리가 아플 지경이었다. 그때 지연이 누나에게 전화가 왔다.
“여보세요?”
[아까 왜 전화했어?]
“너 누구 만났어?”
[친구.]
“친구 누구?”
[어? 유리.]
거짓말을 참 못하는 지연이 누나였다. 내가 지금의 장면을 보지 않았더라도 이상하다는 낌새를 감지할 수 있을 정도로 어설픈 연기였다.
“여자야?”
[응. 근데 왜 전화했었어?]
“나 집 앞이야.”
[응?]
“너의 집 앞이라고.”
지연이 누나는 말이 없었다. 당황해 아무 말도 못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나와.”
나는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었다. 달려와 변명을 해도, 용서를 빌어도 난 봐주지 않을 것이라고 마음먹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달려올 줄 알았던 지연이 누나는 한참이 지나서야 천천히 걸어오고 있었다. 그 모습에 어처구니가 없어서인지 허탈한 웃음이 나오며 오히려 마음은 진정되는 것 같았다.
“그 남자가 유리누나야?”
“아니.”
“거짓말 한 거야?”
“아니.”
지연이 누나의 성의 없는 대답에 약간 짜증이 났다.
“그럼 뭔데?”
“유리랑도 같이 있었어.”
“그걸 날더러 믿으라고 하는 말이야?”
“믿지 않아도 어쩔 수 없지만 사실이야.”
“못 본 사이 많이 뻔뻔해졌다.”
“사실을 말한 것뿐이야.”
“어쨌든 저 남자랑 같이 있었던 건 사실이네?”
“그냥 친구야.”
믿기지도 않는 말로 피해가는 것도 모자라 말도 안 되는 핑계를 대는 지연이 누나를 보니 헛웃음이 절로 나왔다.
“그냥 친구? 그냥 친구가 어디 있어? 그리고 그냥 친구면 왜 말 안 했는데?”
“꼭 말해야 돼?”
지연이 누나는 날 사랑하는 게 너무 힘들다며 눈물을 보이던 모습을 잊은 것 같았다. 완전히 다른 사람이라고 느껴질 정도로 앙칼진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나는 오히려 잘 됐다고 생각했다.
“이러고 다니고 싶어서 생각할 시간 달랬던 거야? 갈아탈 남자 찾을 시간이 필요했나봐?”
“네가 이러니까 말을 안 한 거야.”
“네가 제대로 말을 했으면 안 이랬겠지.”
“그만해. 이런 사소한 오해로 싸우고 싶지 않아.”
이게 설령 사소한 오해라고 할지라도 나는 사소한 오해로 남겨두고 넘어갈 생각이 전혀 없었다. 어떤 이유에서건 난 지연이 누나와의 정리를 원했고, 그렇게 될 수 있도록 너무나도 쉽게 빌미를 제공해준 지연이 누나였기 때문이다.
“사소한 오해? 네가 바람나서 딴 남자 끼고 다니는 게 사소한 오해야?”
“바람은 누가 났다고 그래?”
“딴 게 바람이야? 나 몰래 딴 남자 끼고 다니는 게 바람 아니면 뭐야? 키스도 하고, 섹스도 하고, 사랑해 이딴 말 지껄여줘야 바람이야?”
“그냥 친구라고 했잖아!”
내 목소리가 동네를 뒤흔들기 직전에 내 핸드폰이 우리 둘 사이를 막아섰다. 난 핸드폰을 꺼냈다. 전화를 건 사람은 소연이였다. 우리의 싸움을 더 키워줄 수 있는 화약이 생겼다. 난 받을까 말까 망설이는 척 하며 은근슬쩍 소연이의 전화라는 것을 지연이 누나가 볼 수 있도록 했다. 그리고는 수신거부를 하고 지연이 누나를 쳐다보니 지연이 누나는 놓치지 않았는지 내게 따발총을 쏘았다.
“말 잘했다. 그럼 너는 뭔데? 아직도 소연이한테 전화 오는 넌 뭔데? 이 여자 저 여자 건들고 다니는 넌 뭐냐고!”
“지금 중요한 건 소연이가 아니잖아.”
“아니. 나한테는 중요해. 난 네가 소연이 정리하고 나한테 잘못했다고 빌러 온 줄 알았거든. 그래서 이렇게 네 앞에 서있었던 건데 지금은 내가 왜 여기 있는지 모르겠거든.”
“넌 딴 짓거리 하고 다니면서 내가 빌기를 바랐던 거야? 너 참 이기적이다.”
“그냥 친구라고 몇 번 얘기해!”
그냥 친구라는 말, 내가 지연이 누나를 사랑하고 있었다면 믿어줄 수도 있었다. 믿지 않았어도 믿는 척이라도 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게 다 무슨 소용인가. 이미 난 지연이 누나랑 헤어질 마음으로 여기에 서있는데 말이다.
“알 게 뭐야? 지금 떡이라도 치고 왔는지…….”
나의 비아냥거림에 지연이 누나는 할 말을 잃었는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지연이 누나의 큰 눈엔 조금씩 눈물이 고였다. 그렇지만 끝내 흘려보내지는 않고 삼켜내며 말했다.
“너 이렇게 나 못 믿으면서 어떻게 지금까지 만났어?”
“믿을만한 모습을 보여줬어야 믿지! 남자 차에서 내린 것도 모자라 희희덕거리다가 들어가는 모습을 보여주고는 널 믿으라고?”
“그러는 넌? 넌 나한테 어떻게 해놓고 겨우 이거 갖고 난리야?”
“겨우? 참, 나. 겨우라고? 너 같은 애랑은 더 이상 할 얘기가 없다. 우리 그만 만나자.”
“그래, 좋아. 나도 너란 놈한테 질질 끌려 다니는 거 이제 지겨워서 못하겠어. 꼴 보기 싫으니까 꺼져!”
지연이 누나의 말에 화가 나고 머리가 돌아버려 뺨이라도 한 대 후려갈겨 주고 싶었지만 나는 이를 악물고 한 마디만 남겨놓고 돌아섰다.
“걸레 같은 년.”
돌아서는 순간 모든 게 후련했다. 이 모든 게 내가 바라왔던 일이었다. 조금도 아쉬운 마음이 들지 않았다. 어쩌면 너무나도 간절히 바라왔던 일이었기에 그렇게 믿었는지도 몰랐다. 지연이 누나가 그 남자에게 했던 표정과 말투가 내 환상 속에서 그려졌던 것일 수도 있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어찌 되었건 내가 바랐던 일이 현실이 되었고, 나는 미안한 마음 따위는 가지지 않아도 된다는 자기위안을 하며 앞으로 펼쳐질 나의 행복한 나날들만 떠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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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부에서 민기가 소연이 아닌 혜림이를 범한 것에 대해 의견이 많으셨습니다.
독자님들의 생각과는 달리 민기는 윤호에 대한 복수의 목적으로 혜림이를 범한 것이 아닙니다.
이게 다 저의 글쓰는 능력이 부족해 생긴 오해겠지요.
그래서 1인칭 시점의 글이 쓰기도 힘들고 읽기도 힘든 거 같습니다.
아무튼 바로 29부도 띄워드리겠습니다.